고등학생 무렵에는 혼자서 글을 쓰고 읽는 일이 잦았습니다. 등하굣길에 흐르던 시냇물을 보면서, 친구와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면서, 수학 시간 책상에 엎드려 수업을 흘려들으면서, 그렇게 무심히도. 그 당시엔 새로운 취미에 재미를 붙였다는 감상뿐이었습니다만, 그것이 사실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이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 혼자만의 위로법은 그 형태만을 바꿔 가며 늘 곁에 존재했습니다. 중학생 때는 시간이 날 때마다 소설책을 읽었습니다(이 시기에 읽었던 책은 『데미안』으로, 제가 기억하는 최초의 자발적 독서입니다). 독서는 진로 고민과 맞물려 찾아온 사춘기로 인한 감정 기복에서 벗어날 제 나름의 도피처였던 것 같습니다. 그맘때 주로 읽었던 장르는 『수레바퀴 아래서』, 『리버보이』 같은 해외 청소년 문학이었는데, 번역본 특유의 문체가 당시의 슬픔과 허적함을 달래 주었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소설보단 시를 더 자주 읽고 썼습니다. 제가 시를 좋아하게 된 것은 같은 반 친구와 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부터입니다. 원래부터 시를 깊이 좋아하던 그 친구는 특히나 허연 시인을 좋아했는데, 서로 각자가 좋아하는 결의 시를 마구 공유한 탓에, 스타일이 섞여 제 글의 분위기도 덩달아 조금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물론 지금은 최대한 밝게 쓰려고 노력 중이에요.) 하하. 그러나 한편으로는 날것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하지만 단정하게 보여 줄 수 있게 되어 좋은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스스로의 감정을 다루는 방법이 더욱 다양해져 사진도 찍고, 글도 쓰고, 물고기도 키우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보다도 어렸던 시절과 현재.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저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위로 또한 전하고 싶습니다. 위로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늘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이 서툴렀습니다. 한 마디 말보다 상대를 위한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탓도 있지만, 마음을 헤아리는 선의가 만용이 될까 두려웠던 탓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눈을 감으면 속절없이 무르팍이 꺾이는 시기에 살고 있는 지금, 나 혼자 누리는 위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외려 따스한 말로 서로를 다독이며 마음의 곳간을 채워 넣는 일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님은 스스로를, 그리고 다른 누군가를 잘 다독이고 계신가요? 남에게 쓰는 마음이 그다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외롭지 않은 봄을 보내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 또한 약소한 응원을 전하며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
Fil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