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알루미늄 샤프를 오래 쥐고 있던 손이 가까워질 때 시큰하고 쌉싸름한 쇳내가 찌르르 머리에 울린다. 또각또각 소리가 경쾌한 그 샤프는 반에서 몇몇 아이들만 갖고 있는, 꽤 거금을 들여야 살 수 있었던 필기구다. 비싼 돈 주고 산 샤프는 당연히 영원히 닳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혹은 그냥 그 사람의 향기마저 사랑했는지. 다 커서 안 사실은 알루미늄도 녹이 슨단다. 그해 그 나이는 그렇게 기억되곤 했다.
9월의 학교는 들뜬 분위기다. 방학을 마치고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하기 바쁜 친구들, 앞으로 다가올 수학여행, 매년 홀을 크게 빌려서 진행하는 축제. 가을의 학교에는 즐겁기만 한 학사일정들이 연달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난 그것들이 마냥 기다려지지 않았다. 며칠 전 친했던 친구와 다투게 되었고 둘 사이의 오해가 반 전체로 퍼진 것이다. 나는 어쩔 줄 몰라 침묵하는 쪽을 택하고 말았는데 해명할 기회도 없이 시간이 지나고 지나 오해는 사실이라는 탈을 썼다. 모두가 즐거운 흐름 속에 나는 낄 수 없었다. 계곡 밑바닥의 오래된 돌처럼 아무도 나를 몰랐으면 하고 웅크렸다. 반 아이들은 알아서 모르는 척해주었고 원하던 바였는데 나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씁쓸했다.
다음 달 초쯤이던가. 지겹던 학교 가는 길이 조금은 걷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반은 한 달에 한 번씩 짝꿍을 바꾸는데 종례하기 한 교시 전 반장이 들고 온 자리 배치표를 보니 나와 E가 짝꿍이 된 것이다. 그와 나는 어색하게 책상을 붙였고 그렇게 3분단 둘째 줄에서 매일같이 만났다.
소위 말해 성격이 좋았던 E를 난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반에 어떤 이야기가 돌았는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나에게 말을 걸어왔고 장난을 쳤는데 싫지 않았다. 그 시간이 좋아지고 즐거워질 때 즈음 자리를 바꾸게 됐는데 이상하게 또다시 E와 짝꿍이 되었고 그다음도, 그다음도. 우린 학년이 끝날 때까지 짝꿍이었다. 수없이 자리를 바꿔봤는데 같은 친구와 이렇게 많이 짝꿍을 한 건 신기한 일이기는 했다. 나와는 반대로 수학을 좋아하던 E는 우리가 세 번째 짝꿍을 하던 날 어이없다는 듯이 ‘우리가 짝꿍이 될 확률’을 계산해서 보여주었다. ‘영 점 몇몇몇몇몇...’ 그렇게 싫어하던 수학이 사랑스러워 보이던 날이었다.
그와 나는 많이 가까워졌고, 무엇보다 자리가 가까웠다. 우리 둘 모두 휴대전화가 없어 집 전화로 연락하고, 집에 가는 길이 반대더라도 하교하다 마주치면 같이 가고, 수업 시간에 몰래 손을 붙잡고, 내가 쉬는 시간에 비스듬히 엎드려 있으면 그는 나의 머리칼을 걷어내 이마를 쿡 찌르기도 했다. 이미 다 아는 수학 문제를 괜히 모르겠다며 E에게 보여주면 가까워지는 거리에 어쩔 줄 몰라 나는 그의 알루미늄 샤프만 바라보곤 했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우리는 별다른 진전이나 확신 없이 머물렀고 다음 해를 맞이했다. 매년 찾아오는 이별의 시간, 졸업식을 앞두고 반 전체가 돌려쓴 롤링 페이퍼를 기억한다. 정확히는 E의 손 글씨를 기억하는 거다. 난 그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다들 장난식 혹은 추억 나열식의 활자들에서 너는 자신감을 더 가져도 될 것 같다며 빼곡하게 적어준 E의 글씨. 그렇게 노란색의 롤링 페이퍼를 들고 학교를 떠났고 그는 역시 그가 좋아하던 수학과 관련된 과를 간 것 같더라.
헤어지기 전 나에게 E를 불러와 달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전하러 교실 뒷문을 연 그때, 사실과 목적이 아니라 내 진심을 전했으면 어땠을까.
*
좋아해. 좋아했어요.
당연히 이름을 불러도 되는 사이가 되고 싶었어요.
나는 나를 후회해요.
Fil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