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있는 컵에 물을 채우고 순식간에 마셔버린 다음
또다시 물을 채운다. 채워진 물은 왠지 모르게 안정을 준다.
그대로 책상에 둔다. 이런 습관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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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뭔가 그럴싸한 것으로 채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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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 점점 잡동사니로 뒤덮여 있었다. 머릿속도 마찬가지였다. 성실함, 창조, 발전의 압박과 그것에 허덕이는 나에 대한 불신, 부끄러움, 자책.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채 아침 해는 무심하게 떠올랐다.
모든 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내가 없는 나의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공백이 무서웠다. 하지만 때론 공백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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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 교양이라서 애써 듣고 있는 영어 수업이 있다. 그날은 발표의 기술에 대한 강의를 진행했다. 슬라이드를 화면에 띄우며 강의가 잘 이어지다가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검은 화면이 나타났다. 의아한 나는 교수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빈 화면은 발표자에게 더욱 집중하도록 만들어 주지요.” 난 잠시 움찔했고, 깨달았다. 사실 슬라이드로 모든 걸 설명하기는 어렵다. 발표는 사람이 곧 주인공이다. 그런데 나는 내 삶을 무엇으로 채우려 했을까? 그렇게 덕지덕지 붙여서 한 장씩 넘기는 나의 하루들이 과연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컵은 무조건 채워져야 하고, 캔버스는 무조건 그림을 담아야 할까. 오히려 비어있을 때 그것이 온전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분명 삶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난 채워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비워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문학 수업에서도 작은 쉼표 하나가 시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작은 쉼표는 글에 운율을 더해주고, 잠시 침묵하게 해주고, 상상하게 해준다. 정말로 그러했다. 빈 시간에 나는 더 깊은 생각을 하고, 나는 비로소 내가 된다.
시끄럽게 화려한 행복보다 내가 필요한 건 아무 소리 없이 텅 비어있는 여유였다. 나에게 평온은 그런 비어있는 것이다. 딱히 무언가로 채우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모든 걸 가득 담지 않은 공간, 날 그 자체로 바라봐 주는 누군가 또는 나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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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 둔 물컵 속에 비친 나를 바라보았다. 물속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 단숨에 다 마셔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