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안녕하세요.
성신여자대학교 필름 사진 중앙동아리 찬빛입니다.
'analog'
아날로그의 본래의 의미는 0과 1로 모든 걸 표현하는 디지털과 달리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양을 나타내는 정보입니다. 알고 계셨나요? 전 사실 몰랐어요. 디지털의 반대 정도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알게 되었답니다.
저에게 아날로그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필름카메라 입니다. 소중한 장면을 담고, 필름을 감고 현상하기까지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은 어느 시간보다 설렙니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필름 결과물과 마주했을 때 더욱 특별한 것 같아요. 발전된 기술이 아니라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함일까요?
오늘 메일링의 제목은 ‘아날로그 = ?’입니다. 당신에게 아날로그는 어떤 것인가요?
익명의 부원, 뮤시, 매실, 하나의 아날로그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57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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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과 필름 - 익명의 부원
‘아날로그’를 주제로 어떤 글을 써야 할까 고민하며 종이 사전을 펼쳐 단어의 뜻을 찾아보다가 ‘아나나비야’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양이를 부를 때 쓰는 소리인데, 그동안 이런 단어가 있는 줄도 몰랐고 궁금해본 적도 없지만, 알게 된 뒤로는 기억 한구석에 계속 머무르고 있습니다.
궁금한 단어로 직항하는 온라인 사전과 달리 종이 사전은 경유지가 많아서 평생 궁금해본 적도 없는 단어를 맞닥뜨리는 순간이 많습니다. 어떤 풍경을 담을지는 내가 정하지만 어떻게 담길지는 알 수 없는 필름 카메라처럼, 우연의 중첩이 만들어낸 결과는 예측 불가능하며 아날로그는 이런 예측 불가능성을 내포하는 것 같습니다. 아날로그의 이런 점은, 무수한 우연을 모으고 헤치며 이루어진 나의 삶과도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한 손에 잡히는 작은 기계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디지털 기기와 달리 아날로그의 물건은 저마다 한 가지 기능밖에 가지지 못해서, 아날로그는 기다림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것 같습니다. 필름 사진은 필름을 다 쓰고도 인화를 맡겨야만 확인할 수 있어서 어느 한 과정이라도 게을리하면 내가 어떤 모양의 마음으로 이 사진을 찍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쌓기 위해서는 마음이라는 접착제를 사용해야 하는지, 시간을 들인 것은 마음에도 기꺼이 들이게 됩니다. 엄지손가락 몇 번 두드리면 흔적도 없이 글자가 사라지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와 달리 손 편지는 차마 벅벅 지워버릴 수 없어 단어와 문맥을 더욱 신중하게 고르며 문장과 시간과 마음을 씁니다. 그래서 아무리 장문의 메시지여도 손 편지를 능가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시간과 마음이 퇴적되어 만들어지는 아날로그의 마음을 느끼고 싶을 때면 학교 중앙 도서관에 가서 오래된 책을 꺼내 듭니다. 무심결에 또는 물건의 헤진 정도에서 시간의 더께를 느끼면 마음 한구석에 그것을 위한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어느 해 가을을 담은 노란 은행잎이나 앞서 읽은 사람의 쪽지가 꽂힌 책을 펼쳐보았던 순간, 한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책에서 수십 년 전 이 책을 빌렸던 선배들의 이름이 그들의 손글씨로 적힌 도서대출증을 발견한 순간이면 내 마음을 한가득 내어주게 됩니다. 어떤 책의 도서대출증 봉투에는 ‘OO아, 사랑해’라고 적혀 있습니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썼을지, 가장 좋아하는 책에 쓴 걸지 아무도 보지 않을 것 같은 책에 끄적인 걸지, 상대방은 이것을 보았을지 등이 괜히 궁금합니다. 수기로 작성한 도서대출증과 누렇게 바랜 책에서, 이런 책을 버리지 않고 서가에 두는 것에서 아날로그의 마음을 느낍니다.
가장 오래전에 빌려진 책이 무엇일지 궁금해서 오래돼 보이는 책을 골라 도서대출증을 확인하곤 합니다. 제가 본 것 중 대출 기록이 가장 오래된 책은 82년 10월 25일입니다. 도서관인 만큼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고 사진을 찍은 탓인지 글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초점이 나갔지만 도서관에서 가장 사랑하는 800번대 서가에서 찍은 필름 사진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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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긋나도 괜찮아
글과 필름 - 뮤시
저에게는 ‘아날로그’라는 말이 잘 어울려요. 저는 과제를 시작하기 전에 무조건 종이에 할 것을 정리하고 계획을 짠 후, 아이디어 노트에 충분히 아이데이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작업을 시작하거든요.
저는 아이패드가 있는데요, 아이패드는 과제를 위한 일러스트나 스토리보드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아이패드에 떠오른 생각을 적기에는 글씨의 삐쳐 나온 획, 색깔 등의 생김새가 신경 쓰이고 필기가 제 생각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해서 이내 내용을 전부 지워버리게 되거든요. 종이 위에 정리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머릿속 역시 정리되지 않아서, 급할 때마저도 ‘일단 정리는 그만하고 과제부터 하자!’와 같은 결심이 무색하게 결국에는 종이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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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중간고사 기간에 잔디밭 위에서 계획을 정리한 모습입니다. 아주 크게 ‘철야!’라고 쓴 게 잘 보이네요. 아마 학기 중 첫 번째 철야를 하는 날이라 강조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저 날 이후로 매주 철야를 해서, 철야에 대해 별다른 감흥이 없어졌답니다.
저는 엽서를 모아서 방 벽을 꾸미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엽서 박물관인 연희동의 ‘포셋’을 좋아합니다. 이곳은 정말 다양한 종류의 엽서들과 기획 전시들이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답니다. 제가 연희동을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연희동을 갈 때마다 꼭 들리는 공간입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마음을 전해주고 싶을 때 무조건 생각나는 곳이에요.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손에 엽서를 한가득 집을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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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가 가득한 또 다른 추천 공간은 같은 연희동에 있는 유어마인드 독립서점이에요. 서점에 있는 책들의 구성이 자주 바뀌고 책과 관련하여 특정 작가의 작품으로 전시도 하니 포셋과 함께 구경하러 가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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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각종 일러스트, 제 사진, 선물 받은 사진, 엽서들로 가득 채워진 제 방 벽의 모습입니다. 일상을 지내다 보면 이런 인테리어에 익숙하고 무심해지지만, 지칠 때 고개를 돌려 벽을 보면 어김없이 기분이 좋아져요. 저는 디지털이 주는 편리함이 있더라도 언제나 곁에 플래너와 아이디어 노트를 갖고 있을 거예요. 종이에는 금방 주의가 환기되는 디지털보다 더 진득한 생각을 담게 됩니다. 쉽게 지울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일까요. 옛날에는 종이에 글씨를 조금만 잘못 써도 화이트로 박박 지웠는데, 지금은 잘못 쓴 것도 ‘이때의 내 모습이지 뭐~.’ 혹은 ‘내가 방금은 생각을 잘못해서 이렇게 엉망으로 적었네. 나중에 보면 재밌겠다ㅋㅋ’하고 종이 위의 들쑥날쑥하고 휘갈겨진 글씨들을 종종 그대로 두고는 합니다. 지워버리고 싶은 것도 그대로 남으니 마치 종이가 '어긋나도 괜찮다'라고 얘기해 주는 것 같아서 실수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네요. 여러분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때면 종이에 적어보세요!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어지러운 형태의 단어들도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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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볼륨을 높여요
글과 필름 - 매실
저희 집에는 거실, 안방, 부엌에 3개의 라디오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부엌의 라디오만 사용하는데, 종종 소리가 지직거려도 주파수를 조심조심 맞추면 쓸만하답니다. 집 안에 울려 퍼지는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와 평범한 사람들의 사연들, 즐거운 음악. 유명 가수의 히트곡이 라디오에서 나오면 그가 얼마나 유명했는지, 언제 어디서 이 노래와 함께 했는지 엄마, 아빠께 고스란히 전해 들었습니다. 듣기만 해도 그 시절의 향기가 정말 매력적이었는지 어린 저도 푹 빠지게 되었고 그렇게 저희 가족은 라디오를 들으며 하나가 되었습니다. 각자 성격도 취향도 다르지만, 옛날 노래는 가족 모두가 흥얼거리면서 따라 부르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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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방송하는 라디오에서도 80~90년대 가요가 주로 나오는데요, 그 이유는 80년대 '마이카 시대' 속 자동차 운전자의 라디오 청취율 상승과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이 청소년에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디오 전성시대의 청취자 즉, 현재 중장년층 세대가 계속 라디오를 사랑하고 사연과 노래를 신청하는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저는 등교 시간인 아침 7시부터 8시까지 라디오와 함께 했습니다. DJ의 활기찬 목소리와 음악소리로 비몽사몽한 아침잠을 깨우고, 아빠가 태워주시는 차 안에서 라디오를 이어서 들었어요. 청취자와 연결하여 퀴즈 10문제를 맞히는 코너가 있었는데, 같이 풀면서 아빠와 사이가 더 좋아졌고, 라디오 방송에서 영어 표현을 알려주면 서로 대화하면서 익히기도 했답니다.
이 외에도 라디오 하면 생각나는 추억이 너무 많네요. 초등학생 때 S사에서 방송하는 '컬투쇼'를 듣겠다고 평소 K사에 맞춰있던 주파수를 낑낑대며 S사에 겨우 맞췄는데, 깨끗한 목소리가 들리던 그 순간의 쾌감이 정말 짜릿했어요. 하루는 저희 언니가 보낸 사연이 당첨이 돼서 상품으로 바나나 한 박스를 받았는데 정작 언니는 바나나를 싫어했기 때문에 제가 대신 맛있게 먹은 기억도 납니다. 집에 친구들을 초대했을 때 라디오 소리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있는 줄 착각했다는 얘기를 듣고 웃음이 나온 적도 있습니다. 집에서 항상 흘러나와서 익숙한 소리가 라디오를 자주 듣지 않는 친구에겐 낯선 소리였을 것입니다. 제 추억에서 라디오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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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LP, 필름 카메라 등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는 아날로그 매체는 편리하고 정확한 디지털 매체가 등장하면서 점점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날로그 매체가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는 공감과 연결이라는 따뜻한 성격 덕분인 것 같습니다. 아날로그는 과거와 현재, 위 세대와 아래 세대, 공간과 시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줍니다. 번거롭고 느리지만, 그래서인지 기억에 오래 남는 특별함이 있는 것 같아요.
아날로그 그리고 라디오의 매력이 전해졌다면 좋겠습니다. 글을 마치면서 라디오에서 들은 노래 중 제 귀를 사로잡은 노래 세 곡을 추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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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 별이 진다네
노고지리 - 찻잔
최백호 - 낭만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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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과 필름 - 하나
여러분 안녕하세요,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흔히 ‘아날로그 감성’이라 일컫는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단 저는 매우 좋아하는 편입니다. 굳이 문자로 보내는 편지보단 손편지를 좋아하고요, 전자책도 좋아하지만 아직까진 종이책이 더 좋습니다. 그리고 음원 사이트를 통해 듣는 음악도 좋지만 cd 플레이어 특유의 기계음을 좋아해서 종종 cd 음악을 듣곤 합니다.
보다 편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원한다면 문자로 편지를 보내고, 전자책을 읽고,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면 되는데, 왜 자꾸만 아날로그 감성에 끌릴까요? 그건 아마도 애정을 쏟는 시간의 정도가 달라서인 것 같습니다.
손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우선 예쁜 편지지와 가장 좋아하는 펜이 필요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 받을 이를 생각하며 온갖 좋은 문장들을 골라 써 내리는 순간은 아마도 문자로 편지를 보내는 일보다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써야 할 일입니다.
종이책을 읽기 위해서는, 우선 서점에 가는 게 좋습니다. 인터넷으로 책을 사도 좋지만 저 같은 경우는 목차와 전체적인 문체를 보는 편이라 책은 대부분 서점에서 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펜이 필요합니다. 인상 깊은 부분을 줄치며 읽어야 하니까요. 몇 번의 터치로 책을 넘기고 밑줄을 칠 수 있는 전자책과는 달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굳이 핸드폰을 제쳐두고 cd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경우도 위와 마찬가지일 겁니다.
마음을 쓰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추억의 꼬리는 점점 선명해지고,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됩니다. 무엇보다 아날로그가 가장 좋은 점은 그 기억마저 희미해져 갈 때쯤 다시 손쉽게 꺼내볼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필름카메라를 좋아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이와 같습니다. 찰나를 담고 필름을 감아 현상하는 모든 과정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만큼 큰 애정이 담기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요. 한 번 현상한 필름 사진은 보고 싶을 때 얼마든지 다시 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잘 나온 사진은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장 최근에, 제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며 함께 보냈던 필름 사진을 공유합니다. 제가 편지와 사진을 건넸던 그날이 마침 바다의 날(5/31)이었다고 알려주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여러분도 주말 동안 손편지 한 번 써 보시는 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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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문주원 박유영 이지윤 홍희서
교정
김나연 신민주 정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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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주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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