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안녕하세요.
성신여자대학교 필름 사진 정동아리 찬빛입니다.
오래된 도서관에 가면 엷은 바닐라 향이 난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이랍니다!
종이의 주성분인 ‘리그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분해되면서 바닐라 향의 핵심 분자인 ‘바닐린’이 생성되기 때문이래요.
책과 사람들이 함께 보낸 시간이 도서관의 푸근한 향기를 만들어 낸다는 이야기는 무척이나 낭만적으로 들립니다.
우리가 도서관을 편안하게 느끼는 이유에도 이러한 비밀이 숨어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바닐라 향에 담긴 삼열, 해류, 앞니도둑, 무화과의 추억을 전합니다.
흰동가리 드림.
p.s 다음 주 심도는 쉬어갑니다. 7월 10일 오후 6시, 150주차 심도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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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과 필름 - 삼열
안녕하세요, 삼열입니다.
수박이 달아진 지금을 여름이라고 불러도 되겠죠? 후덥지근한 날씨 탓에 친구들을 만날 때에도 실내를 선호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더위에 약한 제가 여름을 나는 또 다른 방법은 도서관 피서!
도서관은 늘 조용히 학업에 매진하는 공간 같지만, 생각보다 많은 콘텐츠를 품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제가 도서관에서 해 본 것들을 소개해 드릴게요.
1. 빌린 책 임시 보호하기
- 대출하면서 꼭 읽으리라 다짐했지만 어쩐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그대로 보내준 책들을 기억하시나요? 제 머릿속에는 셀 수도 없이 많네요. 당장 눈앞에도 빌려온 책 4권이 그대로 누워있습니다. 다음 예약자가 없어서 모두 대출 연장을 신청했는데, 과연 이번에도 읽지 않은 책을 보내주게 될지...
2. 철야하며 라면 먹기
- 수정이라면, 캠퍼스를 불문하고 철야 도중에 취식이 가능한 3층 테라스나 지하 편의점으로 도망쳐 간식을 먹어 본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 같아요. 초여름 모기에 잔뜩 물려도 밤샘 공부 도중에 먹는 라면은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걸 빌미로 진솔하게 대화하는 것도 즐거웠고요! 황홀한 종강이 찾아온 지금으로서는 먼 이야기가 되었네요. 가을에 나가신다면 담요를 꼭 챙겨가세요.
3. 뒤뜰에서 캠핑하기
- 1학기 중간고사 시즌에 도서관에서 캠핑용품을 빌려주는데, 공강 시간에 친구들과 텐트를 빌려 낮잠을 잔 기억이 나요. 바람은 솔솔 들어오고 적당히 시원한 날씨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쉬었습니다. 머리가 복잡해서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 새 우는 소리, 바람 소리를 한껏 듣고 싶으시다면 뒤뜰을 추천드려요.
이외에도 교내 장기 연체자 검거, 보존서고 정리, 책 무더기로 나르기 등 어릴 때부터 쌓아 온 재미있는 일이 참 많이 떠오릅니다. 이사를 가면 편한 장소를 빨리 찾으려고 그 지역에 있는 도서관에 먼저 가 보곤 했는데, 마음 한 켠에 도서관을 두면 비로소 정착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더운 계절에 발붙일 곳이 필요하다면 님께서도 조용한 즐거움이 있는 도서관으로 가 보는 건 어떠신가요? 이미 좋아하는 도서관이 있다면 찬빛에게도 공유해 주세요.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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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이 아쉽지만 중앙도서관 옆 뜰에서 자고 있는 멧비둘기입니다. 저 뜰에는 고양이도 있고, 새들도 종종 놀러 오는 곳이니 방문해 보세요! 도서관이 사람에게만 휴식처가 되는 게 아닌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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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과 필름 - 해류
사주에 역마살이 있습니다.
명절 때마다 아빠 뒤에 숨어서 도통 나오질 않을 정도로 낯을 많이 가리는 제가 역마살이 세 개나 있다는 점에서부터 인생이 녹록지 않을 것임을 사주가 예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십 대부터는 떠돌이의 삶을 제 의지대로 ‘선택’했지만, 어렸을 때는 어떻게 ‘떠돌았을까’를 생각해 보니 결국 소설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사를 많이 다니지도 않았거든요.
제 학창 시절은 온통 도서관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저를 찾을 때 늘 도서관으로 왔어요. 저는 그곳에서 온갖 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킹스크로스역과 베이커 스트리트 221B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였고, 미국의 존 그리어 고아원과 캐나다의 프린스에드워드섬은 제가 성장했던 곳이었으며, 오리노코강 하구 근처 무인도와 유럽 어딘가의 키리코 마을은 제가 가장 잦게 모험을 떠나던 곳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저는 가져본 적 없던 자매들 사이에 끼어있기도 했고, 고양이 전사가 되기도 했으며, 전쟁 통에서 가족을 잃어가며 슬퍼한 적도 있고, 마법의 오두막을 타고 유령 마을을 탐험하며 미지의 공포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참 좋은 시절이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 모든 위협에도 살아남았다는 감각과 함께 으스대고 싶은 기분도 들고요.
저는 지금도 발걸음을 잠시 멈춰둘 때면 항상 책을 읽습니다.
단 한순간도 그 공간을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던 것 같아요.
열렬히 사랑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공간은 언제나 ‘나’보다 커서 내가 공간을 안아줄 필요가 없거든요. 너무 쉽게 그곳에 속할 수 있는 거죠. 나를 밀어내지도 않습니다.
대신 등을 떠밀어주고는 해요. 더 넓은 세상으로 갈 수 있게, 더 광활한 꿈과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님에게도 도서관에게 선물 받은 모험의 순간이 있으신가요?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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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과 필름 - 앞니도둑
학창 시절 도서부원이었던 저는 813이라는 도서관 청구 기호 숫자를 유독 좋아했습니다. 시, 소설 가리지 않고 문학으로 분류된 책이라면 가리지 않고 읽었습니다. 책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은 하나의 길로 난 트랙을 벗어나도 괜찮다는 걸 알려줬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방법 또한 알려줬습니다.
점심시간에 방문한 도서관은 진공상태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합니다. 숨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공간에서 간간이 들리는 책 넘기는 소리, 사서 선생님이 책의 바코드를 찍는 소리, 창가 너머에서 들리는 학생들의 웃음소리. 작게 들려오는 소리들은 이어폰을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잔잔하게 들려옵니다. 그 소리를 배경음 삼아 책을 읽곤 했습니다. 적당한 생활 소음이 있어야 책에 집중할 수 있었던 저에게 도서관은 그동안 읽지 못한 책을 읽기에 최적의 장소였죠!
도서관은 책을 ‘디깅’하기에도 참 좋은 곳입니다. 저는 보통 관심이 있는 분야의 책장으로 가서 눈으로 책 제목들을 쭉 훑습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마음이 끌리는 책을 만나면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그 책을 대출합니다. 제가 그 책에 대해서 아는 건 저자와 약간의 줄거리뿐이지만 저의 직감을 믿고 하나의 책을 선택하는 거죠. 그렇게 고른 책은 정말 취향이 아닐 때도 있었고, 눈물을 흘리며 깊게 공감할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 선택한 책이지만 그에 따르는 만족감은 언제나 불확실하기에, 하나의 책을 고를 때는 랜덤 상품을 뽑는 것처럼 언제나 마음이 두근두근합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도서관 책장 사이에서 눈을 감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책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저번 주 점심시간, 책들이 추천해 준 덕분에 점심 메뉴를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를 수 있었어요. 다가오는 여름에는 책들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자 도서관에 더 자주 방문할 예정입니다. 심도 독자 여러분들도 도서관에 방문하여 귀를 기울여 보세요. 아무도 모르는 책들의 비밀 얘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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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과 필름 - 무화과
( 1 )
이사 온 동네에는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도서관이 있었다. 전에 살던 동네의 도서관은 독특한 어감의 지명이 도서관 이름에 들어가서인지, 도서관이라면 덮어 놓고 좋아하는 마음 때문인지, 나의 마음에 쏙 드는 공간이었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도서관이 아닌 다른 도서관으로 향하자니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도서관이라면 덮어 놓고 좋아하는 마음은 새로운 곳일 때 더 효과적으로 발휘되는가 보다. 유아용 자료실을 제외한 모든 자료실과 열람실, 옥상의 하늘 정원,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마주치던 직원분과 열람실의 사서 선생님께서 건네주시던 인사말이 좋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새로운 도서관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놀이터에 가는 마음으로 매일같이 도서관에 출석 도장을 찍었고, 어떤 놀이를 하며 놀지 고심하는 마음으로 그날 빠져들 책을 골랐다. 책 속에는 빠져들 세계가 너무나도 많았다.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러면서도 이 아늑한 공간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2 )
새롭게 다니게 된 학교의 도서실은 사서 선생님이 호랑이 같으시기로 유명했다. 데스크에서 마주하게 되는 무뚝뚝한 말투와 표정에 어린아이들은 자주 겁을 먹었다. 조금이라도 말소리를 내거나 발소리가 커지면 어김없이 꾸지람이 날아왔다. 나는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자주 도서실에 들렀다. 좋아하던 추리 소설 시리즈를 하루에 한 권씩 독파하던 때, 늘 별다른 말 없이 대출해 주시던 사서 선생님께서 먼저 말을 걸어오셨다. 책을 좋아하느냐고, 도서실에 자주 오는 것 같다고. 그날 나는 처음으로 사서 선생님의 미소를 보았다. 반갑게 인사해 주시는 목소리도, 뛰지 말라며 인상을 찌푸리시던 표정도, 대출증을 무심히 돌려주시던 손길까지 여전히 그립다. 내가 졸업한 뒤 같은 학교에 입학한 동생이 용기를 내어 사서 선생님께 내 이름을 물어보았을 때, 선생님은 드물게 미소 지으며 나를 기억한다고 답해 주셨다고 한다.
( 3 )
도서부에 입부했다. 책과 도서관을 좋아하던 마음이 충만하던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하는 감회가 뒤따랐다. 주로 하는 일은 점심시간에 반납된 책을 서가에 정리하는 일. 책과 멀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서가를 돌아다니는 일은 즐거웠다. 길게 늘어선 책장의 끝에서 저 끝을 바라보면,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 속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책의 자리를 찾아 주고자 정신없이 청구 기호들을 훑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 끝나 있었다. 길지 않은 점심시간을 도서실에서 보내는 것에 불만을 가지는 부원들도 있었지만, 나는 내심 당번 날이 빨리 돌아오길 바랐던 것 같다. 어느 날부터인가 당번이 아닌 날에도 자꾸만 도서실로 향하게 되었다. 이유는 없었다. 문을 열고, 서가 사이를 한 바퀴 돌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오는 것이었다. 처음엔 습관인 줄 알았다. 드나들다 보니 몸에 익은 것이라고. 서가 끝에 서서 길게 늘어선 책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 기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릴 때 도서관에서 느끼던 그것이었다.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러면서도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안도감. 책들이 빼곡하게 줄지어 선 미로의 한복판에서, 나는 오랜만에 그 다정한 아늑함을 느꼈다. 비로소 나는 이곳이 여전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놀이터이자, 언제든 다시 빠져들 수 있는 세계임을 깨달았다.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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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강준 김다빈 박유영 최윤서
교정 김민경 이서현 정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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