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안녕하세요.
성신여자대학교 필름 사진 정동아리 찬빛입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세상을 살아가다, 혹은 살아내다 보면
당연하다는 듯 그 속도를 버티고 있는 스스로가 문득 낯설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럴 때는 잠시 멈춰 한 발짝 물러나 봅시다.
세상의 가장자리에 선을 긋고, 그 선 너머의 나를 새로이 탐구해 보는 거예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나와 마주하는 순간,
그어 둔 경계선은 새로운 곳을 향한 또 하나의 출발선이 되어 줄지도 모릅니다.
나아가기 위한 모든 형태의 멈춤을 응원하며,
무화과 드림.
📮 . . . . . . . . 🚦⏯️
찬빛의 네 번째 정기 필름 사진전
<초록불로 바뀌어도 건너지 않기>가 열립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멈춤’을 주제로 하여
분주한 삶의 흐름 사이에 단단한 쉼표를 적어낸
작가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다양한 형태로 일시 정시된 장면 속에
천천히 머무르고 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장소: 성신여자대학교 돈암수정캠퍼스 수정관 1층 가온전시실
일정 : 2026. 5. 12. 화 ~ 5. 16. 토
운영 시간: 오전 10시 ~ 오후 7시 (화~금) /
오전 10시 ~ 오후 6시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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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과 필름 - 박하
첫 직장을 강남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관념적 강남이란, 빠르게 흘러가는 것들이 모여있는 장소 아니겠어요? 사실 서울에 살고 있긴 하지만 직장인이 많고, 차가 엄청나게 막힌다는 점 말고는 이 지역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어느새 지금은 매일 이곳을 지나면서 꽤나 익숙한 장소가 되었답니다. 그래도 8차선 도로에서 쌩 지나가는 차들이라든가, 넓은 도로변에서 횡단보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네요.
졸업생이라는 신분이 대학생보다 더 가까워진 지금, 저는 또 한 번 삶의 경계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처음으로 교정 바깥으로 나와 누구의 보호도, 간섭도 받지 않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는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본가에서 나와 살게 된 지는 5년째지만 점점 어른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카페도 안 가고 외식도 안 하게 됐다는 점에서 특히요.
시끄럽고 번잡한 강남의 길거리를 걷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공허하고 외로운 느낌이 듭니다. 노을이 비치는 유리 빌딩, 유난히 많은 표지판과 신호등, 줄지어 서 있는 버스를 뒤로 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나아갈 준비가 됐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저는 완전한 어른이 되기보다는 그저 다음 단계로만 나아가고 싶습니다.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했던 걸 말하고, 생각하면 슬퍼지는 추억을 흘려보내고, 조금 더 여유롭고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의 나는 나아갈 준비가 된 상태일까요? 지금이 아니라면 나는 언제쯤 준비된 사람이 될까요. 이렇게 망설이다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수많은 생각이 들지만 내일은 더 나아질 거라는 다짐을 하며 오늘도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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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비치는 흐릿한 풍경이 아련해 보이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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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과 필름 - 별생각 없는 동그라미
내 성격은 급하고 남들보다 즉흥적이다. 한 달 전부터 준비하는 만남도 좋지만, 1시간 전에 몰아치는 번개 만남이 더 좋다. 기다림이 싫다. 계속 빠르게, 더 빠르게 흐르고 싶다.
그래서 걸음도 빠르다. 걸을 때는 익숙한 길을 선호한다. 낯선 골목은 싫다. 더욱 빠르게 걷는다.
하지만, 나는 몇 년 사이 한 자리에 고이고 있다. 자잘한 일상은 계속 흐르지만, 거기까지. 눅눅하게 굳은 발목 아래는 들춰보지 않은 지 오래다.
내가 맞이했던 후배들이 등을 보이며 내 앞으로 나아갈 때의 기분은 형용할 수 없이 묘하다.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이 불쑥 밀려온다. 조급한 마음과 다르게 몸은 한없이 늘어진다.
우울한 감상을 토해내다가도 갑자기 대책 없이 긍정적인 생각이 든다. 나는 계속 제자리에 있을 뿐, 뒤로 걷진 않으니.
20대의 5년은 크다. 60대의 5년과는 다르다. 살아온 세월과의 비율이 다르니까.
내가 머무른 3년여의 시간은 앞으로 살게 될 인생의 몇 퍼센트나 될까? 짧은 인생이라면 원 없이 놀았으니 후회 없고, 긴 인생이라면 이 시간은 희석되어 추억으로 남겠지, 싶다.
이런 일련의 자기합리화를 거치고 나면 앞질러 사라지는 사람들도 웃으면서 보내줄 수 있다. 언젠가 다시 만나길, 그렇게 보낼 수 있다.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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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은 한 해의 중반에도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하듯 힘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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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단단한 씨앗으로 거듭나기
글과 필름 - 매실
아주 오래전부터 제 곁엔 ‘그림’이란 이름의 단짝 친구가 있었습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죠. 공허한 종이에 제 손으로 만들어낸 생명들이 꿈틀거리는 순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어요. 그래서 자연스레 그 친구에게 이끌렸어요. 선택의 갈림길에서도 언제나 그 친구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지요. 떠나보낸 다른 친구들이 가끔 그리워졌지만, 내 옆에 있는 그 애가 첫 번째 친구라고 소개할 때가 가장 좋았어요.
그러나 잘 그리고 싶고, 멋있게 만들어내고 싶은 욕심은 간단한 선을 긋는 데에도 부담이 되었어요. 동시에 거대한 세상의 수많은 예술가를 보며 부러워한 적도 많았습니다. 어렸을 땐 그 친구가 낮에도 밤에도 보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친구 옆에 선 제 모습이 작고 초라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그 애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걸까, 스스로 의심하는 밤은 깊어져 갔습니다.
그러다 문득, 미술이란 친구가 없었다면 난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어요. 나를 표현하는 단어이며, 나침반이자, 애정이었던 그 아이는 참 빛나던데. 거울 속 저는 위태롭고 흐릿한 눈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대로 계속 손을 잡고 걷다가는 소중한 그 친구도, 그리고 소중한 나 자신조차도 미워하게 될까 봐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서로 잠시 멀어지기로 했어요. 멀리멀리. 익숙했던 생각의 흐름과 눈앞의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날을 지내보려고요! 그래도 종종 지난날들이 생각나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온전히 저에게 집중하려 합니다. 시들했던 제가 충분한 햇빛과 물을 섭취하여 단단한 씨앗이 되었을 때, 다시 그 친구에게 찾아가 자랑할 겁니다. 나다운 초록 잎을 틔울 준비가 되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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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 기간 한가로운 나들이 중 흙투성이 인형을 만났습니다. 초록의 생동과 붉은 벽 사이에 기대어 앉은 인형이 저와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님도 혹시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해서 거리를 둬야 했던 존재가 있나요? 혹은 치열하게 달려오다가 숨이 차오른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잠시 멈춰서 그동안 가려져 있던 자신의 마음을 돌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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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과 필름 - 못
나는 자주 멈추는 사람이다.
밭은 숨만 내쉬며
짧게 닿는 요만큼만 겨우 걸어내고는
또 멈춘다.
몸을 실은 열차에서 내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고 싶고,
돌아가지 않고, 이대로 계속 멍하니 응시하고 싶다.
나만 정지한 채로,
열차가 멈추고, 사람이 쏟아진다.
시간도 앞으로만 쏟아진다.
나는 앞으로 고꾸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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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달려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란 걸 언젠가 알아버렸다.
몰아붙이고 나면 너무 오랜 날들을 헤맸다.
한 번 쏟아진 나와 날들은 주워 담기 힘들고,
잘 메말라 버린다.
쏟아지기 전에 멈춰야 한다.
자주 멈춰서 순간을 담아야 한다.
숨을 골라야 한다.
하던 일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기.
바삐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지는 해를 담아내기.
시선을 멈추고 눈을 마주하기.
달려가는 세상에서 뛰어내려 나의 속도로 멈추기.
그렇게 모인 멈춤들로 또다시 나아간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반칠환의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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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심도 깊은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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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는 나를 굳게 믿고 잠시 멈춰 숨을 고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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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강준 김다빈 박유영 최윤서
교정 김민경 이서현 정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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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주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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