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안녕하세요.
성신여자대학교 필름 사진 정동아리 찬빛입니다.
필름 카메라에는 세월이 담겨 있습니다.
언젠가 새것으로 세상에 나와서는 한 명, 두 명, 혹은 더 많은 주인을 만나며 우리 찬빛 부원들에게 닿았습니다.
수십 년을 넘어 만나게 된 ‘나’와 카메라.
카메라들은 우리 손안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이야기들을 카메라만은 알고 있을지도 모르죠.
사진 찍을 때의 버릇이나
잠시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날들의 감상 같은 거 말이에요.
필름 카메라의 시선으로 바라본 ‘나’에 대하여, 이 작은 기계장치의 마음을 헤아려보아요.
별생각 없는 동그라미 드림.
📮 . . . . . . . . . . ✉
오늘 레터로 심도 Vol.7이 마무리됩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구독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짧은 휴식을 가진 뒤, 4월의 봄과 함께 새로운 시즌 Vol.8로 다시 찾아 뵐게요!
앞으로도 이어질 찬란한 이야기들에 계속해서 함께해 주시길 바라며,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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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과 필름 - 후르츠 펀치
안녕, 나 카메라. 내 이름은 오토보이야-사실 이게 진짜 이름인지는 모르겠어.
내 주인을 한번 소개해 볼게.
내 주인은 사람을 되게 많이 찍어. 대부분 같은 사람들이긴 한데,
(친구가 별로 없나 봐) 요즘엔 다른 사람일 때도 있어.
사실 주인은 날 자주 쓰진 않아.
얼마 전에 얇은 최신식 카메라를 들였더라고. 필름 없어도 되는 그런 거.
솔직히, 멋진 거로 따지면 내가 훨씬 낫거든? 그치만 걔는 가벼워 보여. 어쩐지 매일 들고 나가더라.
그래서 좀 속상해. 주인하고 사이가 사이가 멀어지는 느낌이야.
그걸론 자기 사진을 많이 찍는 것 같던데, 나한테는 항상 어색하다는 말만 하고 본인을 찍진 않아.
함께한 세월이 몇 개월인데...
주인은 밖에도 잘 안 나가나 봐.
얼마 전에 펑펑 내리는 눈을 보고 깜짝 놀랐잖아. 내 마지막 기억은 푸릇푸릇한 풍경에 멈춰 있는데...
자고 일어나니 겨울이 되어 있었어.
제일 최근엔 바다를 봤어. 바다는 처음 봤는데 정말 파랗고 크더라.
오래간만에 열심히 일했지. 3개월 만에 새 필름이 들어왔다고.
안 좋게 떠들었지만 그래도 주인하고는 좋은 추억이 많아.
나와 함께 있을 때 주인은 항상 웃고 있거든. 그리고 나를 정말 소중하게 여겨줘.
외출하고 오면 날 항상 시원하게 닦아줘. 나만큼 깨끗한 카메라 없을 거라고 본다.
주인은 집에선 엄청 과묵한 편인데, 사람들을 만나면 그렇게 웃더라. 그리고 나로 꼭 그들을 찍어줘.
그래서 주인 얼굴은 잘 기억이 안 나.
렌즈로 봐야 아는데 말이야, 집에선 도통 닫아두기만 하니까... 난 내가 처음 찍은 그 사람이 주인인 줄 알았다고.
근데 아니더라? 아직도 그 안경 쓴 여자인지 머리 긴 여자인지 금발 여자인지 헷갈려.
아무튼 남들한테 날 좀 맡겼으면 좋겠다.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망가지는 건 슬프잖아.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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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과 필름 - 익명의 부원
199*년의 어느 날, 종로 세운상가
짧은 머리의 청년과, 머리띠로 머리를 곱게 넘긴 아가씨.
청년은 하늘을 가르는 전투기를 찍고 싶다 말했죠. 튼튼하고 줌이 되는 기계식 카메라를 찾습니다. 그렇게 저는 주인을 만났습니다! 새로 만난 제가 반가운 듯 저에게 눈을 가져다 대어 서로를 담아줍니다.
시간이 흘러 청년과 아가씨는 신랑과 신부가 되고,
엄마와 아빠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스쳐 가는 가족들을 같은 자리에서 바라보았습니다. 둘을 똑 닮은 아이들이 보입니다. 걸음마를 떼고, 엄마 아빠를 발음합니다. 아이들이 제 주인들의 키까지 자라날 때까지도 저는 제자리입니다. 예전에는 중요한 날이면 저도 꼭 함께 외출했었어요. 어느샌가 주인들은 저를 잊은 듯 더 작고 빠른 친구들만 데려가기 시작했어요. 찍다 만 롤이 감겨 있는데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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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폼 디자인 등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아마 1999~2005년 사이에 담은 사진 같아요.
2023년 가을, 서재
여전히 컷이 남은 골드200 필름과 녹아 버린 배터리와 함께 책장 위 한 칸에 있습니다. 어느 날 제 몸이 번쩍 들립니다! 필름실이 열리고… 소리가 들립니다. “아빠!! 나 이거 가질래!” 그렇게 저는 새로운 주인을 만났습니다. 새로운 주인은 필름을 빼내고, 먼지를 후후 불어 닦아주었어요. 그런데도 아직은 저랑 낯을 가리는지 한참을 살펴보기만 하고 데리고 나가주지를 않네요...
2024년 1월, 종로 세운스퀘어
어쩐지 익숙한 곳입니다. 나의 새로운 주인은 나를 고쳐 쓰고 싶어 이곳에 왔다고 말합니다. 이곳이 제가 주인을 만난 곳이었단 걸 새 주인은 알까요? 녹은 배터리도, 녹슨 셔터도 아주 말끔해졌습니다. 이제 저를 데리고 나들이를 갈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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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새로운 주인과 함께한 지 벌써 4년이 되었습니다. 열여섯 롤의 필름을 담고, 수많은 도시와 새로운 나라를 누비었습니다. 주인은 제가 무겁다고 가끔 투덜거려요. 그래도 저로 찍은 필름들을 한참을 들여다보고요. 친구들에게 제가 좋다고 자랑하는 이야기도 합니다. 새로운 주인과 함께 또 어떤 곳을 누비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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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녕하세요!
(셔터 준비됐고, 필름도 들어가 있습니다.)
별난 은도끼의 카메라들입니다.
편의상 저희를 1, 2, 3이라고 불러주세요!
1번, 캐논 EOS 750QD입니다.
저는 별난 은도끼와 함께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어요.
제가 볼 때 은도끼는 사진을 찍기 전에 한 번 더 멈추더라고요.
셔터를 가볍게 누르지 않아요.
이미 장면은 지나갔는데 한 박자 늦게 누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진이 딱 맞기보다는 조금 늦는 편이에요.
정말 신중한 사람입니다.
2번, 올림푸스 뮤 줌 70입니다.
저는 주머니에 들어가는 카메라인데,
은도끼는 저를 꺼낼 때도 서두르지 않아요.
멀리서 줌을 당기기보다는 그냥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립니다.
잘 나오면 좋고, 조금 흔들려도 그러려니 합니다.
이 사람은 결과보다 과정에 더 관대합니다.
아, 요즘은 저를 가지고 세로 사진을 많이 찍더라고요!
3번, 독일에서 온 디카입니다.
은도끼는 저한테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아요.
다른 필름 카메라와는 달리 확인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진을 바로 보지 않는 날이 많습니다.
기억을 먼저 남기고 파일은 나중에 확인하는 편이에요.
아무래도 필름 카메라들의 영향이겠죠?
저와 함께한 시간이 제일 긴데, 요즘은 찬빛에 들어가고 나서 1번, 2번이랑 더 자주 노는 것 같아 조금 서운합니다.
1, 2, 3 일동
카메라는 자주 바뀌지만 은도끼는 늘 비슷한 스탠스 같아요. 다만, 그 스탠스가 매번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기록될 뿐이죠.
이번에는 최근 상하이에서 찍은 사진들이 함께 올라가네요! 사진을 보시면서 어떤 카메라가 찍었을지 한번 추측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우리 은도끼와 메일링 서비스를 함께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별난 은도끼의 카메라 1, 2, 3 드림.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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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과 필름 - 무화과
저는 숱한 이들의 손을 거쳐 왔지만, 지금의 주인과 함께하게 된 건 1년도 채 되지 않은 일입니다. 확실히 오랜 시간을 함께한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되짚어볼 만한 추억이 꽤 쌓인 것 같기도 해요.
처음 주인과 만났던 날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주인은 그날 만났던 모든 사람에게 제 자랑을 했어요. 정말 가지고 싶었던 카메라였는데, 도통 마음에 드는 매물을 찾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주인은 오랜 시간 동안 저를 찾아 헤맸던 모양이에요. 저는 사진을 찍지 않을 때면 주로 깜깜한 파우치 속에서 생활하는데요, 그날만큼은 사진을 찍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파우치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몇 번이고 부지런히 저를 자랑하는 주인의 손길이 마냥 귀찮게 느껴지지만은 않았습니다. 주인은 앞으로 내가 어떤 풍경을 담아내길 바랄까, 하는 생각만 들 뿐이었죠.
무심코 한 생각이 문제였던 걸까요? 첫날 이후로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파우치 속에서 보냈어요. 그 말인즉슨, 주인은 저와 함께 사진을 찍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공백 속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건 주인이 무척이나 저를 아꼈다는 거예요. 가끔씩 파우치에서 꺼내 가만 바라보고 있거나, 괜히 필름실을 한 번씩 열어 보거나, 예행연습을 하듯 셔터를 눌러 보기도 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주인이 저에게 필름을 끼워 주었어요. 그날 만난 친구에게도 역시나 제 자랑을 몇 번이고 하더니, 아주 고심해서 두 장의 사진을 찍었어요.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셔터를 누르는 주인의 손에서는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한 번 파우치 속에서 나왔던 날. 저는 주인과 마음껏 바다를 구경했습니다.
바다를 보고 온 날을 기점으로 주인과 함께하는 외출이 잦아졌어요. 주인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장소에 가곤 했죠. 몇 번이고 파우치 속에서 저를 꺼내 들며 자신이 보는 세상을 기꺼이 공유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추측이지만요, 주인과 함께하는 외출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주인처럼 카메라와 필름을 아주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 같았어요.
방 안에서 가만히 카메라를 바라보는, 조심스럽게 셔터를 누르는, 고민 없이 마음에 드는 풍경을 담아내는. 벌써 이만큼의 수식어를 주인의 앞에 붙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만났던 날부터 지금까지의 시간 동안, 주인에게는 어떠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게 분명해 보여요. 자세한 내막을 저는 영영 알 수 없겠죠. 저한테는 주인에게 말을 걸 방도가 없으니까요.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들이 있지요. 최근 들어서는 셔터를 누르는 주인의 손에서 느껴지던 떨림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습니다.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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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SIMDO)의 일곱 번째 시즌, Vol.7 (2025. 10. ~ 2026. 2.)
- 참여한 사람들 -
글과 필름 해류, 고은별(별난 은도끼), 김다빈(흰동가리), 김미정, 김민경(별생각 없는 동그라미), 김수경, 박유영(매실), 유수민(못), 이유진(Raven), 이지민(시끄러운 먼지), 이현지(후르츠 펀치), 전지영, 무화과, 영영
발행 레이아웃 박유영 인트로 김민경, 유수민, 이지민
교정 김수경, 전지영, 최윤서
디자인 로고 박소연 카드뉴스 유주혜, 윤서연, 정예나
총괄 박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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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심도 깊은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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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사랑이 담긴 모습에 피식 웃음 짓게 된다
흔들린 나는 곧 너를 비추고
우리의 사랑을 투명하게 반사한다
카메라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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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의 137번째 이야기,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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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4월에 새로운 시즌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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