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안녕하세요.
성신여자대학교 필름 사진 정동아리 찬빛입니다.
한 해가 끝나갈 때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그 속에 유난히 반짝이는 장면이 보입니다.
유한하고 반복되는 도돌이표의 삶일지라도
그 사이사이엔 반드시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리고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이 반드시 있죠.
오늘은 네 명의 작가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손에 꼽는 날들을 공유합니다.
여러분에게 생애 최고의 순간들이 자주 찾아오길 바라며,
시끄러운 먼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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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과 필름 - 전지영
너무 더워 종강을 손꼽아 기다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또 한 해가 벌써 마무리되고 있네요. 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행복한 순간들을 차곡차곡 쌓아 가고 계시나요, 혹은 조금 지치고 마음이 무거워지고 계시나요? 어떤 모습이든 괜찮다고 말해 드리고 싶어요. 이 글을 읽는 동안만큼은 그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쉬어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번 심도에서는 제가 힘들 때마다 꼭 떠올리는 제 생의 가장 소중했던 하루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전국의 고등학교 3학년 대부분이 그렇듯, 그 시절의 저 역시 입시의 불안감과 압박감으로 인해 많은 나날을 숨이 턱 막히게 보냈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활발하게 지냈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그 밝았던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너무 초라해졌어요. 마음에 들지 않는 성적과 성격, 너무 못나 보이는 나를 미워하는 게 제일 쉬웠고요. 지치고 지겨운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밤에는 ‘내일 아침에도 눈을 뜰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물론 매번 눈은 떠지더라고요.
그러던 중 여름방학에, 하루 도망치듯 할머니 댁으로 내려갔어요. 강원도 철원에 있는 할머니 집은 공기가 유난히 맑고, 여름에도 선선한 곳이에요. 그날 저는 마당 평상에 누워 딱 한 가지 일만 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는 것.
올려다본 하늘은 놀라울 만큼 푸르고 넓었어요.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와 발끝을 간질였고, 자동차 소리도 사람들 말소리도 없는 조용한 동네라 귀를 기울이면 새들의 짹짹거림과 녹음의 바스락거림만 들렸어요. 계절 흐르는 줄 몰랐던 제가 오랜만에 자연과 함께 어울렸던 그 여름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해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잠깐 멈춘 뒤, 후- 하고 내쉬면 평온함이 온몸에 번져가던 느낌. 그 하루가 제 인생에서 가장 온전히 ‘나’였던 날이었어요.
그날의 하늘을 통해, 편안함이란 불안이 완전히 없어져야만 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불안 속에서도 ‘내가 지금 어떻게 숨을 쉬고 있는지’ 천천히 의식해 보는 짧은 시간만으로도 지친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을 얻을 수 있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매번 해야 할 일과 이루고 싶은 목표들 사이에서 자꾸만 자신을 다그치며 살게 되는 것 같아요. 12월이 시작되면서,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고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후회도 하고요. 그래서 혹시라도 님의 마음에도 요즘 불안이 밀려오고 있다면, 잠깐이라도 숨을 고르고 올 한 해도 잘 버텨온 자신을 돌봐주는 시간을 꼭 가져 보셨으면 해요.
그날의 하늘이 제 삶을 단단히 붙잡아 주었던 것처럼, 님의 하루에도 조용히 기대어 숨을 돌릴 수 있는 작은 여백이 꼭 찾아오길 진심으로 바라요.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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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사진입니다.
오키나와의 나무와 식물들은 대체로 울창하고 거대합니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낯선 도시를 가로지르다 보면 어느 순간 굽이치는 숲속에 들어와 있고, 바깥으로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에 눈은 동그랗게 커지죠. 산이라는 인식과 정글 같기도 하다는 낯선 감각이 동시에 떠오르고요.
그러던 어느 순간, 사방에 보이는 모든 버스 창문이 전부 초록색으로 잠식되었어요. 거대한 대지에 삼켜진 것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창문에서는 적당히 더운 바람이 불었고, ‘스스슥’ 하는 나무들이 바람에 부딪히며 흔들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어요. 여기서 잘못되면 분명 내 모든 뼈 사이로 풀들이 자라날 거야, 난 그들의 장신구가 되겠지, 그런 확신을 주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날이 제 생애 최고의 날인 이유는, 단지 이 순간이 제게 늘 수채화로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미술 선생님인 이모를 둔 저는 어렸을 적에 수채화를 가장 어려워했어요. 여러 번 덧칠해야 한다는 것도, 흐릿하다는 것도, 나무를 칠할 때 초록색만 써서는 안 된다는 것도 전부 다 어렵고 난해하기만 하더라구요. 그렇다고 도망만 칠 수는 없으니 관성적으로 예시본을 그대로 재현하는 걸 반복하기만 했죠.
그렇지만 수채화를 가르쳐 주는 이모는 늘 좋았어요. 제가 머리를 붙잡고 끙끙거리고 있으면 어느새 이모는 다가와서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며 제 붓 위로 손을 얹었고, 이모가 붓질을 몇 번 하고 나면 제 그림은 순식간에 다채롭고 아름다워졌어요. 이러니 어릴 적 제가 이모를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죠.
이모는 여백을 알았고, 초록 숲속에 노란색, 주황색, 갈색을 거침없이 얹을 수 있는 화가였어요. 아직도 저는 그 오키나와의 산속의 모습을 그려낼 때 어떻게 해야 다른 색을 섞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필름의 도움을 받아 기록을 해 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 버스 안에서 저는 생애를 통틀어 가장 달콤한 낮잠을 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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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하루의 일기
글과 필름 - 매실
마음에 드는 옷을 차려입고, 약속 장소에서 *를 기다렸습니다. 땀을 흘리며 인사하는 *를 보고, 참 오랜만이라 어색했지만 그만큼 기쁜 마음을 담아 인사했습니다. 한적한 미술관에서 전시를 보고, 조용한 독립영화도 본 뒤 감상을 나누다가 아기자기한 가정식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크림 오므라이스를 먹으며 *의 근황을 듣고, 감히 따라가지 못할 것 같은 *의 어른스러움에 놀라워하고, ‘그 시간 동안 잘 있어 줘서 다행이다’라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근처의 박물관도 들어가 구경하고, 관심 있는 내용이 있으면 눈을 반짝이는 *를 지켜보았습니다. 제가 정말 아끼는 공원으로 초대했는데, 안쪽의 비밀스러운 길에서 빈둥거리는 고양이 세 마리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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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름을 아는 식물을 만나면 하나씩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모습에 또다시 동경을 품었습니다. 맛있는 빵을 사서 집으로 돌아온 다음 차담 시간을 가졌습니다. *가 꽁꽁 싸맸던 가방을 주섬주섬 풀었습니다. 어머니와 만든 블루베리잼과 일본에서 가져온 녹차 가루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아, 이렇게나 정성스럽고 풍부한 음식을 오랜만에 맛보았습니다. 초여름 더위와 발의 피로를 식히며 우리는 긴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오후에 비가 내리자, 우산을 꺼내 밖으로 나서고, 학교 작업실로 데려가 *를 생각하며 그렸던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는 연신 감탄을 표현했습니다. 속으로 ‘네가 더 대단해!’라고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어둡지만 조명이 따뜻했던 가게에서 국물을 먹으며 소소한 취향도 나눴습니다. 다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거리에서 바닥에 반사된 조명을 보며 나란히 걸어갔습니다. 내일의 나들이는 더 재밌을 거라는 기대감과 시간이 조금은 느리게 흐르길 바라는 마음으로 잠에 들었습니다.
이 만남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던 아침, *로부터 갑작스레 받은 문자 메시지를 계기로 이어졌습니다. 그동안 연락을 못 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꿈인가 싶어 몇 번이나 그 짧은 글자들을 다시 읽었습니다. 저는 사실 연락이 끊긴 이후에도 *의 얼굴을 자주 떠올렸습니다. 불안하고 미성숙한 시절을 함께했던, 앳되고 명랑한 장면에서 멈춰 있는 얼굴. 가끔 *가 꿈에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문자를 읽으며 닿지 않았던 일방적인 신호가 드디어 돌아온 기분이었습니다.
*를 만난 하루는 그 어떤 하루보다 값졌습니다. 오래된 기억이 연결되는 순간, 속에서 이 세상이 혼자 견뎌 내기만 하는 곳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영원히 이어지는 관계는 드물지라도 용기는 운명을 넘어설 수 있다는 법칙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마웠습니다. 그리움은 과거의 부속품이 아니라 미래로 향하는 나침반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만든 인연들이 나를 만들어간다는 걸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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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과 필름 - 별난 은도끼
To. 찬빛
2025년 3월 16일 일요일을 기억하시나요?
그날 저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지하철 노선에서 길을 몇 번이고 확인하면서도 겉으로는 괜찮은 듯,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7기 OT 이후 처음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긴장을 감추려고, 조금은 서툰 평정심을 유지하던 날이었습니다. 찬빛에서의 첫 출사였고, 그 사실만으로도 스스로를 계속 조절하게 되는 하루였기 때문입니다. 빨간 가디건을 입고 망원동으로 향하던 제 모습은 지금 돌이켜 보면 조심스럽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다는 마음이 겉으로 드러났던 것 같습니다. 한강에 도착했을 때 아직은 추웠고 사람들 사이의 거리도 그런 날씨와 비슷했습니다. 어색한 탓에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서 어떻게 있어야 할지에 대한 답을 조용히 찾고 있었습니다.
출사 후 함께한 카페에서는 조금 편안해졌습니다. 다만 익숙함보다는 아직은 낯섦이 많은 상태였기에 말 한마디 그리고 행동 하나를 고르는 데에도 제가 어떤 사람이길 원하는지 계속 따져 보게 되더라고요. 이 과정 역시 새로운 집단에 들어온 사람이 겪는 자연스러운 적응의 일부였을 겁니다. 저녁에 먹은 뜨끈한 쌀국수는 그 하루의 흐름을 정리해 주는 느낌이었습니다. 긴장이 조금씩 풀리면서 오늘 괜찮았는지, 스스로 점검할 여유도 생겼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스크린 도어에 비친 제 표정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습니다. 크게 변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곳에 속했다는 그런 확신이 든 표정이었습니다. 이때 수정이가 되어 찬빛의 일부가 된 것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래서 저는 25년 3월 16일을 최고의 날로 기억합니다.
또 그날을 이렇게 기록해 둡니다.
언젠가 다시 읽게 되더라도
그때도 조금은 성장해 있기를 바라며,
별난 은도끼 드림.
p.s. 따뜻한 연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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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심도 깊은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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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씨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따뜻함이 피어나는 하루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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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김민경 박유영 유수민 이지민
교정 김수경 전지영 최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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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의 126번째 이야기,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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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주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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