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플이 띄워 주는 음악을 듣는 일
플래터에 LP판을 끼우고 톤암을 옮겨
음악을 듣는 일
작은 서점과 영화관을 부러 찾아가는 일
도심을 걷다가 언제든 발견할 수 있는
높은 건물 속으로 들어가는 일
토독토독 타자를 치기
탁탁탁 지우기 복사하기 붙여넣기
딸깍 사각사각 슥삭슥삭 손으로 써내리는 일
한식 분식 양식 … 장바구니 담기 …
주문하기 … 배달 도착
한 그릇을 위해 수 걸음을 나서고,
씻고, 다듬어 스스로에게 내어주는 일
톡, 꾹- 찰칵 잘 나왔네
필름을 감고 이거저거를 맞추고
현상을 맡기고 받아보는 일
내 손안에 있는 작은 기계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세상에서 굳이 드넓은 창으로 시야를 돌리는 일들이 있죠. 그런 일들은 더 번거롭고, 대개는 더 값도 비싸지요. 간편함, 신속함, 효율성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오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쓴 시간과 마음들은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요.
올해 님은 어떤 ‘굳이’를 하셨는지도 궁금해요. 저는 8월 말, J와 함께 떠난 대전 여행에서 간편한 택시 대신 굳이 땀을 뻘뻘 흘리며 탔던 자전거가 생각나요. 자전거는 예상치 못한 하천 앞길로 인도해 주었어요. 새빨개진 얼굴을 식혀주던 바람을 가르며 마주한 낯선 풍경들이 오래오래 반짝이고 있답니다.
저의 오랜 뿌리가 되어준 시를 소개드리며 마무리할게요. 우리 앞으로도 번거로운 다정에 자주 멈추고, 다시 걸어보아요!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반칠환,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속도에 관한 명상 13」
Fil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