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안녕하세요.
성신여자대학교 필름 사진 정동아리 찬빛입니다.
결과를 알 수 없는 필름을 찍는 일은 꽤 까다로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변수가 필름을 시작한 순간부터 주어진 운명이라면, 우리는 더 큰 용기를 품고 필름 그 자체를 사랑할 수 있어요.
이렇게 남겨진 필름은
저마다 다른 의미로 다가와 마음속에 자리 잡아요.
오랜 추억을 담고 있어서,
예측이 어렵고 불완전해서,
손끝에 남는 물성이 있어서…
필름에 새겨진 우리의 진심은 어떤 빛으로 남아있을까요?
빛과 시간에 바치는 네 편의 러브레터를 보내드립니다.
진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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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름은 삶의 쉼표
글과 필름 - 별난 은도끼
쉼표는 숨을 고르고 이전 문장을 곱씹을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준다. 디지털처럼 즉각적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볼 수 있는 필름은 그 자체로 되돌아보는 매개체가 된다. 필름은 디지털 사진처럼 여러 장을 찍고 필요 없는 사진을 지우거나 찍은 뒤 바로 사진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한 롤을 완성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한 장 한 장 찰나를 기록하기 위해서 그 순간에 더 집중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즉, 쉼표처럼 느림을 허락하고 기다림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필름이다.
최근 본가에 다녀왔다. 정리할 것도 있고, 엄마가 자꾸 안 쓰는 방 좀 치우라고 하셔서 미루고 미뤘던 귀향이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낡은 서랍장이 눈에 밟혔다. 열면 뭔가 재미있는 게 나올 것 같은 기분…
서랍을 하나씩 열어봤다. 종잇조각들, 일기장, 인생네컷 사진들… 그리고 그 사이의 낡은 카메라 가방 안에서 무언가가 굴러떨어졌다. 작은 반투명 플라스틱 케이스. 흐릿하게 ‘KODAK’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케이스를 들어 올렸다. 까맣게 말린 필름 한 롤. 도대체 언제 어디서 찍은 걸까. 머릿속이 하얘졌다.
“엄마 이거 뭐야? 내 거 맞지?”
“그거? 아마 15년 전 여행 갔을 때일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엄마는 확신이 없어 보였다. 기억을 되짚을수록 오히려 더 가물가물해졌다. 결국 나는 다음날 호기심에 스캔해 보기로 다짐했다.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다. 대부분 오래되어 색이 바랬거나, 흔들렸거나, 혹은 엉망일 거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스캔된 파일을 받아 열었다. 파일 속 펼쳐진 첫 장면은 흐릿한 바다 풍경, 그 다음은 지쳤지만 애써 브이를 해보는 가족 사진… 그 순간, 기억이 거센 파도처럼 덮쳤다.
보라카이의 바닷바람, 수건을 뒤집어쓴 아빠, 모래에 발이 빠질까 투덜대던 엄마, 그리고 모든 순간을 담기 위해 셔터를 누르던 나. 사진은 바래 있었지만, 그 안의 온기는 여전히, 어쩌면 그때보다 더 따뜻했다. 그 여름도, 그 웃음도, 이 필름 속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순식간에 디지털로 저장되고 또 그만큼 쉽게 지워지는 세상에서, 잊혀졌던 한 통의 필름은 나를 조용하고 묵직하게 붙잡아주는 듯했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빛이 사라져도 필름은 아날로그 방식 그대로 묵묵히 기록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서랍을 바라본다. 혹시 또 다른 필름에 잊고 있던 계절이 잠들어 있을까 싶어서…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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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필름은 즐거운 고민
글과 필름 - 반장갑
그런 말이 있다, 가장 간단한 고민이 가장 어렵다고. 싫어하는 건 있지만 좋아하는 것들은 딱히 없는 나이기에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매번 쉽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고민이라고 여겨지는 점심 메뉴 고르기도 거의 맨날 고민하다 보면, 그저 다름없는 고민이 되어버린다. 이런 나에게 필름은 유일하게 즐거운 고민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카메라로 어떤 사진을 찍고 싶은지에 대해 고민하는 일은 항상 설렌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필름을 구매하고, 카메라에 장착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미 필름이 장착된 다른 카메라를 들고 나가기도 한다. 그래서 보통 한 롤을 완성하기까지 대개는 반년 정도가 걸린다. 평소라면 당장 결과를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일 테지만, 오직 필름에 대해서는 여유로워진다. 그만큼 한 장 한 장을 신경 써서 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필름 촬영에서만큼은 게을러도 된다는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나는 쇼핑을 싫어한다. 특히 옷은 정말 최악이다. 아주 약간의 디테일 차이만으로도 큰 변화를 주어 패션 감각이 없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필름의 경우에는 완전히 반대가 된다. 회사들도 이제 점점 문을 닫고 있고, 수요층이 예전만 하지 못하기에 선택지가 그렇게 넓지는 않다. 가끔은 이 점 때문에 약간 속상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런 환경이기에 내가 필름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 색감과 감도, 이 두 가지만 신경 쓰면 필름 선택에 대한 모든 고민이 쉽게 해소된다는 게 너무 좋다.
필름의 힘은 참 신기하다. 학교에서 시키던 과제들로 인해 글쓰기가 기계적이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나를 글을 쓰고 싶게 만들고, 쇼핑을 싫어하던 나를 쇼핑하게 만든다. 이과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숫자만 보고 살아갈 줄 알았던 나를 자꾸 다른 세계로 이끌어준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세계로 나를 데려다줄지 너무 기대된다. 더 많은 세계로 가기 위해 오늘도 나는 즐거운 고민을 하러 간다.
☆.。.:*・°☆ 。+.。☆゚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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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필름은 사랑이 반사된 거울
글과 필름 - 매실
삶 사람 사랑
서로 닮아 있으며 순환하고 공존하는 존재
오늘도 작은 카메라를 들고
곁에 가까이 다가간다
신중히 찍는다 조심- 조심-
마지막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듯이
내 마음과 시선이 완전히 일치할 때
셔터를 깜빡인다
어느새 셔터를 누르고 있다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사랑이 지나가는데
급한 마음에 손가락만 움찔거린다
걱정스러운 그 사랑을 다시 만나기 위해
기다린다 몇 달 혹은 몇 년을
서툰 사랑이 담긴 모습에
피식 웃음 짓게 된다
흔들린 너는 곧 나를 비추고
우리의 사랑을 투명하게 반사한다
살다가 사람과 사랑을 하며
마주친 수많은 장면과 감정
맑은 날엔 희망을
흐린 날엔 용기를
훗날 돌이켜 볼 때는
그리움 위에 애정을 겹친다
좋아하는 마음을 배운다
남들이 흔히 부르곤 하는 그런 사랑은 아닐지라도
나 같은 초보에게 필름이라면
사랑을 가르쳐 줄 수 있다
점점 비싸지는 필름을 턱턱 장착하는 것은
오직 그 풍경을 보기 위해 먼 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하나 둘 셋 하면 멋쩍게 지은 미소를 보고 따라 웃는 것은
현상소 연락에 들뜬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가는 것은
암흑에 파묻혀 슬퍼하면서도
너의 테두리를 찾으려 더듬거리는 것은
나만의 사랑하는 방법이다
필름은 나의 사랑이 반사된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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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촬영에 가장 좋다는 포트라 400 필름을 사고, 비싼 돈 들여 카메라 수리도 하고, 설레는 맘에 허겁지겁 첫 스튜디오 촬영을 마쳤는데 결과물은 거의 다 어둡게 나왔을 때. 저의 심정은 오직 슬픔이었어요. 기대가 컸던 만큼 좌절하고, 후회했지요. 하지만 지금 이 사진을 다시 보니 서툰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아 마음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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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공간, 사랑스러운 두 생명체를 한 화면에 담고 싶었어요. 새근새근 잠든 고양이를 빤히 바라보던 강아지가 귀여워 카메라를 들었는데, 강아지가 금방 돌아가 버리더군요. 머뭇거린 몇 초가 참 아쉽지만, 아무렴 어떤가요! 이 사진을 추억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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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사진입니다. 인공 눈으로 만든 썰매장에서 다 큰 대학생끼리 모여 몇 번이고 썰매를 타고 놀았어요. 모두가 어린아이로 변했던 어느 겨울날. 동화 속 친구들처럼 불그스름해진 서로의 볼이 귀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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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빛나는 꽃이 사랑 모양을 하고 꾸벅꾸벅 인사하고 있네요. 늘 이런 작은 존재들에게 시선이 가요. 아무리 작아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숨어있던 새로운 표정을 발견할 수 있답니다. 이 순간 제 마음속 모퉁이에도 작은 풀꽃이 자라나는 기분을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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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필름은 빛
글과 필름 - 나비
순간은 빛이다. 눈동자 깊은 곳까지 전부 타 버릴 것처럼 눈에 선명히 남는 것도 있고, 너무 빨라 기억의 잔상에조차 남지 않는 것도 있다. 지나간 시간을 잰걸음으로 앞지를 때면, 어떤 것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불현듯 슬퍼지곤 한다.
유한한 삶을 운명으로 지고 태어난 우리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들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억은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어, 몸에 갇히게 되는 순간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진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새겨 두고자 하는 욕심으로부터 우리는 ‘빛’을 붙들어 두기 시작했다. 어떤 기억은 글자 단위로 분해되어 펜 끝에서 있어야 할 문장으로 돌아가고, 어떤 기억은 매끈한 물과 기름이 되어 캔버스를 적시고, 또 어떤 기억은 렌즈 너머의 역동적인 한 순간이 되어 빛이 바랠 때까지 정적의 세계에서 살아남는다.
필름은 빛이다. 휘발되는 기억을 애써 붙잡아 둘 만큼 오랜 시간을 살 수 없는 우리에게, 사진은 그 자체로 가장 선명한 빛이 된다. 필름 속의 단편은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으나 그 자체로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 필름을 선택했던 이유, 이 장소에서 셔터를 눌러야 했던 이유, 그날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 끝에 얼마나 많은 망설임이 존재했는지… 물론 의도 없이 우연히 찍힌 사진은 그 자체로 새로운 기억이 된다. 찰나의 빛이 만들어 낸 어설픈 우연이, 빛의 속도로 멀어져 가는 과거로부터 선물을 보낸 셈이다.
물론 우리가 잠시나마 필름의 형태로 붙들어 둔 빛도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명한 사실에도 사람들이 필름에 순간을 새기고자 하는 이유는 낭만을 체화하여 그 자체로 몸에 새길 수 있는 기억을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찰나의 순간, 찬란한 빛을 온몸에 담은 채 기억이 휘발되는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하여.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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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심도 깊은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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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36컷의 필름을 갖게 된다면,
무엇을 기록하고 싶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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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김수경 박유영 조현진 홍희서
교정 이지민 정유민 홍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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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의 116번째 이야기,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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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주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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